TRPG 백업용
Back light History 본문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Day6,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中
Back light History
w. 리자몽
개요
악당의 삶이란 지루하고 따분한 법입니다.
그래요, PC. 늘 정해진 전개를 반복하는 당신의 일상말이죠.
PC, 당신은 이 소설의 악당이자 주인공의 라이벌입니다.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주인공.
이제는 주인공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인정하고 져줘야 하는 당신.
그런 삶이 짜증나진 않나요? 화가 나지는 않나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악당의 운명인걸요.
오늘도 다시, 똑같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소설 속 첫 등장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한 주인공을 비웃는 모습이었죠.
시계를 보니 곧 조례가 시작될 시간이에요.
담임 선생님은 2분 뒤 들어오실거고, 주인공은 선생님이 교탁에 출석부를 내려놓을 때 도착할 겁니다.
앞으로 벌어질 익숙한 풍경을 상상하며 창가의 당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기록되지 않은 등장인물, KPC였습니다.
형식: 오픈-레일로드
배경: 현대 여름 고등학교
인원: 1:1 타이만 / KP를 둔 2인
플레이 난이도: ★(초심자가 플레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키퍼링 난이도: ★★☆(진행은 어렵지 않으나 다수의 NPC를 굴려야합니다.)
플레이 타임: ORPG 3~5시간, TRPG 3시간
권장 기능: 관찰, 지능, 듣기, 정신
로스트 확률: PC 없음, KPC 없음
추천 관계 및 성향
KPC: 추천 성향 없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KPC라면 더 잘 어울립니다.
PC: 어렸을 적 주인공보다 악당을 더 좋아했던 사람.
혐관 제외 모든 관계에 어울립니다. 탐사자의 자유도가 다소 낮습니다.
+텍스트 묘사가 다소 많습니다! 6만자 가까이 됩니다(...) 라이터는 괘념치 않으니 부디 편하게 마음대로 잘라주세요. 언제던 원 스토리의 뼈대와 진상만 유지된다면 허가 없이 모든 변형이 가능합니다.
주의사항
1. 본 시나리오는 초여명사의 Call of Cthulhu 7th Edition을 기반으로 작성한 팬메이드 시나리오입니다. 본 시나리오는 원작자 Chaosium Inc.와 도서출판 초여명의 권리를 침해할 의도가 없습니다.
2. Call of Cthulhu는 도서출판 초여명에서 번역해 판매하고 있는 유료 룰입니다. 따라서 룰북을 소지하지 않은 키퍼링을 금지합니다. 발각시 해당 사용자의 계정은 블락처리 되며 플레이 로그의 삭제 및 인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룰북 판매 링크)
2-1. 본 시나리오는 세션카드, 인장을 제외한 모든 금전적 커미션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상단의 세션카드는 라이터가 제작한 것으로 자유롭게 사용 및 가공이 가능합니다.
3. 라이터는 해당 시나리오가 멸시적 호칭으로 불려지거나 비하당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시나리오에 대한 품평, 시나리오 비하 등의 행위가 2회 이상 발견될 시 시나리오가 무통보 비공개처리 될 수 있습니다.
3-1. 이 시나리오는 소위 여름 청춘물이라 불리는 장르의 양식을 따와 작성했습니다.
4. Trigger warning: 없음. 그러나 글리치, 노이즈 등의 연출에 거부감이 있는 분에게 약한 불편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4-1. PL에 따라 불쾌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사항이 존재하므로 KP는 사전에 시나리오를 일독한 뒤 PL에게 주의사항에 대해 안내해주세요.
5. 시나리오 내 신화생물·주문·아티팩트 등 전반에 대한 독자적 해석 및 변형, 창조가 존재합니다.
6.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시나리오 스포일러를 금지합니다. 개요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스포일러이므로, 엔딩명을 발설하시는 것 역시 주의 부탁드립니다.
7. 진상을 제외한 모든 부분의 개변이 자유롭습니다. 개변시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문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개변 후 재배포는 삼가해주세요. 개변사항을 전달해주시면 라이터가 즐거워합니다!
진상
세션을 시작하기 전 KP는 탐사자에게 다음과 같은 간략한 소설의 내용과 역할을 사전에 알려주세요. 세션 진행 전 카메라를 훔친 것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정해둔다면 더욱 좋습니다. 아래의 내용에는 라이터가 임의로 설정한 이유(반장, 교내 소란을 우려한 것)들이 같이 쓰여 있으니 탁에 맞춰 가감해주세요.
‘탐사자는 학급의 반장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선의로 행한 일들이기는 하나 교내 소란을 자주 일으켜 학급 분위기를 흐리는 인물입니다. 탐사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추리소설로, 카메라를 잃어버린 친구를 안타까워한 주인공이 카메라를 대신 찾아주려다 그 이면에 숨겨진 사건을 마주합니다. 탐사자는 주인공의 안타고니스트(대립하는 인물)로, 주인공은 탐사자에게 약한 열등감을 갖고 있고, 탐사자 역시 알고 있습니다.’ |
KPC는 PC가 등장하는 소설의 애독자입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소설을 좋아했어요. 책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소설을 읽고, 읽다가, 끝내 외울 만큼 말이죠. 그는 늘 책을 옆에 끼고 다녔고, 잠잘 때에도 머리맡에 책을 두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처음엔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졌던 그는 점차 소설 속의 다른 등장인물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요. PC, 당신말이죠.
KPC는 소설을 여러 차례 읽으며 주인공보다 PC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럴만했어요. 열정만 앞섰을 뿐 제대로 하는 일이 없이 평면적인 이상주의자적 성격을 가진 주인공에 비해 PC는 악한 면과 선한 면을 동시에 가졌고, 때로는 그로 인해 갈등하는 인간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다, 그의 주장은 현실적이며 설득력 있게 그려졌거든요.
KPC는 점차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PC라는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이유로 악당이 된 걸까요. 어떤 이유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건 뭘까요. 늘 주인공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PC가 환하게 웃는 때가 있었을까요? PC,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요. 소설에 쓰여있지 않은 진짜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우연히 KPC는 서점으로 향하던 중 골목길의 틈새에서 차원을 이동하던 차원의 부랑자(p.305)를 마주했고, 차원의 부랑자가 연 차원 이동 관문에 휘말려 PC가 사는 소설 속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등장인물로 인해 PC가 있는 소설은 새로운 내용으로 쓰여지기 시작했어요. 당연합니다.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사건,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으니 이전과 같은 이야기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PC와 KPC는, 페이지를 새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쓰여진 적 없던, 그러나 줄곧 KPC 홀로 써왔던 '우리'라는 소설을요.
문제가 있다면, KPC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기억에 남을 수록 그가 있어야 할 차원이 바뀌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과, 이 소설의 결말이 아직 나지 않았다는 거겠죠.
PC는 KPC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끝맺어질 수 있을까요?
시나리오
(*추천 배경음악은 테스트플레이 팀께서 도움 주셨습니다. 특히 도입과 9번 챕터의 반응이 좋았다 전해주셨습니다.)
(*이외에 도입/엔딩에 Day6 -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피아노 버전, 중간은 Day6 - 좋아합니다,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 행복합니다 를 사용하신 탁도 있었습니다.)
1. 도입
( 추천 BGM:
닐케이 - 여름방학 / https://youtu.be/lWUh-nPA7TI )
♪♫♪-
조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던가요.열린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당신의 뺨을 간지럽힙니다. 초록빛 그늘로 점점이 물든 흰 커튼이 바람을 따라 펄럭여 당신의 시야에서 아른거려요. 아직 초여름인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해 목 뒤에 땀이 흐릅니다. 한여름이 되면 얼마나 더 더워지려 그럴까요.
그렇지만 여름은 오지 않을 거예요. 이 소설은 여름이 되기 전 끝나니까요.
오늘도 당신의 하루는 평범합니다. 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도, 창가 가장 뒤쪽의 당신 자리도, 당신 책상 위 가지런히 놓인 필기구와 노트마저도.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열린 교실 문 바깥에서부터 들립니다. 저 낮고 규칙적인 발소리는 분명 담임 선생님의 것이에요. 몸을 반쯤 내밀고 바깥을 살피던 같은 반 친구가 빠른 발걸음으로 제자리에 앉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너무나도 뻔해서 지루할 정도입니다. 앞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 위에 출석부를 내려놓고, 때맞춰 머리가 온통 헝클어진 주인공이 뒷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겠죠. 선생님의 가벼운 꾸지람에 주인공은 바보처럼 웃다 당신과 시선이 마주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주인공을 비웃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볼 거예요.
자연스럽게 탐사자의 시선은 뒷문으로 향합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나부끼는 커튼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문에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띕니다. 포스트잇의 끄트머리가 팔랑거리네요. 저곳까지 바람이 닿는 걸까요? 갈색 문에 노란 포스트잇이 덩그러니 붙어 있으니 신경이 쓰입니다. …그런데 잠깐, 저 자리에 원래 포스트잇이 있었던가요?
실패: 나부끼는 커튼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서 불편합니다. 커튼이 얼굴을 가리지 않게 손으로 붙드는 당신의 눈에 교실 뒷문의 포스트잇이 눈에 띕니다. 누가 붙여둔 걸까요. 갈색 문에 노란 포스트잇이 덩그러니 붙어 있으니 신경이 쓰입니다.
(※KP 정보: KPC가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과 메모들입니다. 소설 바깥의 인물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메모 역시 소설에 섞여 들어왔습니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을 향해 친구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출석을 부르기 위해 선생님이 교탁 위에 출석부를 올려놓으면,
“죄송합, 으악!”
뒷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주인공…이,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지고 순식간에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인공에게 향합니다. 탐사자의 시선까지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넘어진 주인공은 민망한 듯 뺨을 긁적거리고, 주인공과 부딪친 사람은 손을 뻗어 주인공을 일으켜 세워요. 그는 주인공이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서 교실 안으로 들어와 당신의 정반대편 분단 가장 뒷자리에 앉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당신에게는 낯설어요. 그럴법도 합니다. 이건 소설의 첫 장면과 너무나도 다르니까요.
“주인공, 괜찮니? 그나저나 지금 반에 온 사람은 누구……?”
놀란 건 선생님과 학우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낯선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요. 그제야 가방 속 책들을 책상 위에 꺼내던 그가 고개를 듭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책상 위에 그는 단 한 권의 책만을 내려놓습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교과서나 공책 같지는 않아보여요. 게다가 그는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만 그의 교복은 묘하게 새것 같은 티가 나는데다 어디에도 명찰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반 학생이 맞기는 할까요? 반을 잘못 찾아왔는지도 모르죠.
실패: 책상 위에 책을 한 권 내려놓는 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나저나 저 사람, 누구일까요? 교복이 깔끔해서 더 눈에 띄는 것 같아요. 명찰 없이 다니면 감점일텐데, 겁도 없는 모양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전학 온 KPC입니다.”
KPC. 그게 저 이방인의 이름인가봅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다 외웠다고 자신했는데, 저 이름은 처음 들어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작가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그것도 완결난 소설에 넣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찰나였을까요.
고개를 돌린 KPC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그는 당신을 보고 웃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가 작게, 입모양을 지어 속삭입니다.
“보고싶었어, 탐사자.”
…탐사자는, 아직 KPC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이 작은 소란을 뒤로 하고 종소리가 울립니다.
오늘도 수업이 시작됩니다.
2. 첫 페이지, 국어 시간
(추천 BGM: Sereno - 북극성의 기억 / https://youtu.be/Gio0nseLQJA , 갈등 이후
PLvsAA OST - Forest 3 / https://youtu.be/CwTduzWvP8k)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첫 번째 수업은 국어였던가요. 높낮이 없이 평온하게 교과서 속 시를 읽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와 칠판 위 또각또각 맞닿아 쓰이는 분필 소리가 섞여 퍼져나갑니다. 단조롭고 평온한 수업시간이지만 탐사자는 도통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KPC 때문이겠죠.
탐사자의 시선이 KPC에게 향합니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KPC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교과서 대신 아까 가방에서 꺼낸 책을 읽고 있습니다.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읽다가도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무슨 책을 저렇게 재미있게 읽는 걸까요? 그는 이윽고 펜을 들어 옆에 놓인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해요.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면 자꾸만 궁금증이 들어요. 도대체 KPC는 누굴까요? 단순히 새로운 조연의 등장인 걸까요? 그렇지만 지금? 이 소설은 이미 끝맺어진걸요. 다 끝난 소설이 새로 쓰여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작가가 다음 편을 쓰기라도 하는 걸까요?
(※KP 정보: KPC는 자신이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설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는 중입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메모해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야 할테니까요. 따라서 이 다음 장면인 쉬는 시간에 탐사자와 주인공이 대립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커져가는 궁금증을 안고 한참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탐사자.”
“탐사자?”
이런.
누군가 탐사자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선생님이 탐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선생님 뿐 아니라, KPC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탐사자에게 향해 있어요. 탐사자를 불렀던 건 선생님인 모양입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걸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려요. 선생님은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탐사자에게 말합니다.
“탐사자가 KPC와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수업 내내 KPC만 바라보는 걸 보니.”
“그래, 네게 부탁할 게 있어. KPC가 오늘 전학와서 아직 학교에 익숙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탐사자가 KPC에게 학교를 소개시켜주는 게 어떠니?”
…뭐라구요?
당황스레 선생님과 친구들을 바라보면, 어느덧 책을 덮고 당신을 바라보는 KPC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아이들도 선생님과 당신, 그리고 KPC를 번갈아 보다 저들끼리 소곤거리기 바쁩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 KPC가 기쁜 목소리로 대답해요. 당신을 바라보며 짓는 KPC의 미소는 한껏 들뜬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탐사자, 부탁해도 될까. 난 아직 학교를 잘 몰라서 네가 도와줬으면 해.”
이런 분위기라면, 저런 표정이라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난처합니다. 다음 쉬는 시간엔 분명, 주인공과 탐사자가 대립해야 할 장면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마지못해 탐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담임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자 마자 모두의 시선이 KPC에게 향합니다. 모두들 오랜만에 맞이하는 전학생의 등장이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에요.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너도 주인공이야? 아이들의 물음에 KPC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탐사자에게 다가옵니다. …탐사자에게?
“안녕, 탐사자. 내 이름은 KPC야.”
비어 있는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KPC는 악수하려는 듯 당신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합니다. KPC의 너머로 당신과 KPC를 바라보며 아까처럼 소곤대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여요.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합니다. KPC가 당신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또는, KPC의 관심이 탐사자에게만 향해 있는 걸 질투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여기 있는 모든 인물들의 감정이란 작가의 설정이자 작가가 보인 관심이니까요. 이미 이 소설의 악역을 도맡은 탐사자에게 또다른 서사가 부여되다니, 조연들이 질투하기 충분합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반 친구들은 조연이잖아요. 당신과 다르게.
(※KP 정보: 이하 간략하게 자기소개 시간 및 교실 조사 시간을 갖습니다. 아직 KPC는 탐사자에게 자신이 소설 바깥에서 온 인물이란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고, 말해도 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디서 왔느냐, 네가 새 등장인물인 거냐는 질문에는 적당히 얼버무려주시고, 포스트잇과 책에 대해 물으면 다음 지문을 출력해주세요.)
탐사자가 포스트잇을 살펴본다면
교실 뒷문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을 떼어봅니다. 분명 어제 이 자리에는 포스트잇이 없었는데, 이 포스트잇은 오래 전 붙여둔 듯 손때가 타고 끝이 조금 구겨져 있어요. 그 위에는 펜으로 쓰인 단정한 글씨체가 눈에 띕니다. ‘탐사자, 너를 알고 싶어.’ 라고 쓰여 있네요. …그런데 여기 왜 당신의 이름이? |
KPC에게 책에 대해 물어본다면
“책?” 당신의 말을 들은 KPC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탐사자를 바라봅니다. 대답하기 싫은 눈치는 아니지만,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얼굴이에요. 그는 대답을 고르는 듯 잠시간 침묵하다 얼버무립니다. “그냥, 소설책이야. 내가 책을 좋아하거든.”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책이야. 늘 곁에 들고 다닐 만큼.” 얼마나 좋아하면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요. 좋아하는 책이라는 말은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책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웃는 KPC의 표정은 행복해보이는걸요.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내심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KPC가 저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누굴까요. KPC도 이 소설의 독자들처럼 주인공을 좋아할까요? 저 소설 속 악당도 주인공에게 늘 져줘야만 하는 운명일까요? KPC가 들고 있는 소설책 속 악당에게 동질감을 느끼다니,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요. |
KPC의 책을 살펴볼 경우
갈색의 손때 묻은 책의 표지가 눈에 띕니다. 어찌나 자주 읽었는지 책등이 조금 헐거워져 있어요. 책의 제목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니, 이상한 책이네요. 책 표지 한쪽 구석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KPC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KP 정보: 포스트잇을 보고 KPC의 책을 살펴볼 경우 하단의 지문을 추가적으로 출력해주세요.) ‘탐사자, 너를 알고싶어.’ KPC의 이름을 본 순간 탐사자는 자연스럽게 포스트잇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KPC의 글씨체는 포스트잇의 글씨체와 똑같았으니까요. 하지만 KPC는 오늘 새로 전학왔는걸요. 우연일까요? 그가 포스트잇을 미리 붙여두었을 리 없잖아요? 게다가 그는 탐사자보다 늦게 교실에 들어왔잖아요. 누가 한 장난인지 모르지만 짓궂네요. |
(※KP 정보: 대화가 어느정도 진행되면 하단의 지문을 출력해주세요.)
“얘들아, 집중!”
누군가 교탁 위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인공입니다.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교탁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친구들을 바라봅니다. 드디어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이 시작될 모양입니다.
“그 이야기 들었어? 오늘 아침에 옆 반에 도둑이 들었대.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나봐.”
옆 반에 도둑이 들었고, 누군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했었죠. 우리의 주인공은 도둑을 붙잡고 소중한 물건을 친구에게 돌려주기 위해 이 반에서 자원자를 모집할 겁니다. 탐사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친구들이 주인공과 함께 도둑을 쫒아가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였으니까요. KPC가 새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소설의 내용까지 변하지는 않았나보네요. 탐사자는 뒤이어질 소설의 줄거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봅니다. 탐사자, 지능 판정.
성공: 다음 장면은 점심 시간이던가요? 주인공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친구에게 다가가 오늘 아침의 일에 대해 물어보던 중 누군가 교실에서 뛰쳐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쫓아갈 겁니다. 범인을 놓친 주인공은 그때 본 뒷모습과 학교 사람들의 뒷모습을 대조하며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숨겨진 학교의 비리를 마주할 거예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학교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리의 주축이던 교장이 학교를 떠나며 이 소설은 마무리지어집니다. 오늘 아침 도둑맞았다는 그 소중한 물건은 비리를 저지르는 교장의 모습이 녹화된 카메라였죠. 그게 어디 숨겨져 있더라… 아마 체육관 가장 안쪽 사물함이었죠? 실패: 다음 장면은 점심 시간이던가요? 주인공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친구에게 다가가 오늘 아침의 일에 대해 물어보던 중 누군가 교실에서 뛰쳐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쫓아갈 겁니다. 범인을 놓친 주인공은 그때 본 뒷모습과 학교 사람들의 뒷모습을 대조하며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숨겨진 학교의 비리를 마주할 거예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학교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리의 주축이던 교장이 학교를 떠나며 이 소설은 마무리지어집니다. |
탐사자도 알고 있습니다. 교장의 비리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요. 하지만 탐사자는 주인공이 범인을 좇는 과정에서 엉뚱한 친구가 오해당해 괴로워하는 것도 봤어요. 그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 친구가 조연이고 엑스트라이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주인공은 끝까지 모를겁니다. 그건 그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주인공이 신경쓰지 않는 이야기는 단지 몇 줄의 묘사만으로 너무나도 쉽게 정리됐어요. 오해를 풀고 모두가 다시 행복한 학교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라는 두어줄의 문장만을 남겨둔 채.
소설의 결말 이후, 하교길 텅 빈 운동장에서 울던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탐사자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요. 한 사람의 잘못을 파헤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잘못을 뒤집어 쓰는 건 옳은 일인가요? 단지 그게 그 등장인물의 정해진 역할이고,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될 테니까? 그렇다기에는 소설이 끝나도 우리는 끝나지 않는 걸요. 반복될 겁니다. 누군가 오해받고,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할테고, 또다시 울겠죠. 소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그 친구의 마음은 누가 알아주죠?
탐사자의 말이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어집니다. 기분이 상한 탓이었을까요. 주인공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탐사자를 바라봅니다. 당연해요. 탐사자가 여태껏 이렇게 강하게까지 반대한 적은 없으니까요. 순식간에 반 분위기는 얼어붙습니다. 모두가 탐사자의 눈치를 보고 있어요. 그 주인공조차 말이죠. 쏟아지는 시선이 비난처럼 느껴져 목에 공이 걸린 듯 답답합니다. 그들의 시선 너머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분명 소설의 전개를 위해 탐사자가 굽히고 주인공에게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양보하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대로라면 쉬는 시간이 끝나고 사건이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그런다면, 그래서 그 친구가 오해받지 않는다면…
“난 탐사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KPC?
고개를 돌려 KPC를 바라봅니다. KPC는 교탁 위 주인공에게 못을 박듯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난 탐사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라고. 경악일까요, 당황일까요. 숨을 들이켜는 소리, 탄성, 혹은 걱정 담긴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교탁 위에 올라선 주인공의 낯빛이 붉게 물들다 푸르게 질립니다.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일은 주인공에겐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중한 걸 도둑맞아서…”
“누군가가 슬퍼하고 있다고? 그리고 친구로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거지?”
더듬더듬 주인공이 말을 다시 이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KPC가 그의 말을 끊습니다. KPC의 말에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다들 곳곳에서 탄성을 뱉거나 야유를 보냅니다.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 끝맺어버리는 등장인물이라니요. 그런 등장인물은 이제껏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KPC,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탐사자와 주인공 사이의 갈등은 어느덧 주인공과 KPC의 것이 됩니다. KPC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아요. KPC는 주인공이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 뒤이어 말합니다. 우리는 경찰이 아니다, 오해받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냐, 쉬는 시간 동안 조사하기엔 너무 짧지 않느냐. 모두가 알고 있지만 주인공에게 물어본 적 없는 것들을요. 주인공이기에 몰라도 되었던 이야기. 주인공이기에 신경쓰지 않았던 이야기.
KPC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자니, 조금 웃음이 날 것도 같습니다. 저 모습은 전혀 주인공답지 않은걸요. 당당하지도 못하고, 주관도 없고, 확신도 없으니 말이에요. 적어도 주인공이라면 이정도는 각오했어야 하지 않나요. 아니, 원래 그랬죠. 처음부터 이 서사가 주인공에게 친절했던 것 뿐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갈 주인공이 이렇다, 저렇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반 친구들도 먼저 나서지 못하고 주인공을 바라보기만 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KPC와 탐사자의 말이 맞으니, 선생님께 말씀드려보겠다며 교탁 아래로 내려와요.
♪♫♪-
높낮이가 일정한 기계 종소리가 울립니다. 아, 처음입니다. 사건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쉬는 시간이 끝나버린 건. 소설의 내용이 완전히 뒤틀려버렸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이밀지만,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을 거라는 대책 없는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건 분명 KPC 때문일 겁니다. 이야기를 바꾼 건 KPC잖아요, 탐사자가 아니라. 속편의 주인공은 어쩌면 KPC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KPC가 주인공이라면 이번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쓸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적어도 저 주인공보다는 더 현실적이겠죠. KPC는 일어서며 탐사자를 바라봅니다.
“탐사자. 점심 시간에 학교 소개를 해주지 않을래?”
선생님이 부탁하셨기도 하니, KPC와 같이 점심시간을 보내야겠죠. 탐사자의 대답을 들은 KPC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 새로운 등장인물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나타난 걸까요. 네가 써내려갈 이야기는 어떤 줄거리를 갖고 있을까요.
KPC, 너는 어떤 사람이죠? KPC, 네가 알고싶어요.
3. 두 번째 페이지, 점심시간
(추천 BGM: 두번째달 - Crystal Flower / https://youtu.be/L3pgGxs92G0 )
햇볕이 창문 너머로 따갑게 비치고, 푸른 하늘을 흰 비행운이 가로지르는 시간입니다. 모두들 급식실로 향한 뒤라 교실은 한산하기 그지없어요.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으면 어느덧 KPC가 탐사자에게 다가와 맞은편에 앉습니다. 이 학교는 부지가 꽤 큰 편이니, 서두르지 않으면 점심 시간 안에 학교를 다 못 보여줄지도 모르겠어요.KPC와 탐사자는 1층의 중앙 로비에 서서 학교 안내도를 살펴봅니다. 열려 있는 유리문 너머로는 점심도 포기하고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네요. 전학생이 당장 알아야할 곳이라면 1층의 교무실, 2층의 도서관, 별관의 체육관 정도일까요. 어디로 갈까요, 탐사자?
(※KP 정보: 이하 간단한 RP 타임 겸 조사 시간을 갖습니다. 조사 구역은 교무실, 도서관, 체육관, 운동장입니다. 모든 구역을 둘러볼 필요는 없으나 반드시 도서관을 포함해 조사해주세요. 도서관 외의 구역에서 벌어지는 일은 구역을 지정할 필요가 없으니 KP의 재량에 맞추어 섞어 진행해도 좋습니다. KPC는 이미 이 학교의 구조를 알고 있으며, 단순히 PC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교무실‘시험 문제 출제중입니다. 노크하고 들어오세요.’ 교무실 문에 붙어 있는 A4용지의 문구가 보여요. 닫혀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선 교무실은 대부분 자리가 비워져 있어요. 가장 안쪽 자리에 교장의 명패가 놓인 큰 책상이 보이고, 그 주변에 담임 선생님, 체육 선생님, 미술 선생님의 자리가 눈에 띕니다.
담임 선생님 자리담임 선생님은 식사하러 가신 듯 자리에 계시지 않네요.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펼쳐진 출석부와 문학 교과서가 놓여져 있습니다. 탐사자의 시선이 가장 먼저 출석부로 향합니다. 펼쳐진 출석부는 늘 같은 날에서 끊겨 있습니다. 소설이 끝나면 다시 첫 날로 되돌아가니 당연한 거겠죠. 출석부를 보는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출석부에는 빼곡이 쓰여진 학생들의 이름이 빈 자리 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명단을 보던 탐사자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KPC, KPC, KPC……. KPC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오늘 전학왔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KPC의 이름은 커녕, 그의 이름을 새로 적을 자리조차 없는걸요. 그리고 5교시에는 탐사자의 결석 처리도 되어 있어요. 5교시에 결석하는 건 주인공잖아요? 선생님이 실수하신 모양이니 이따 말씀드려야겠네요. 실패: 출석부에는 빼곡이 쓰여진 학생들의 이름이 빈 자리 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5교시에는 탐사자의 결석 처리도 되어 있어요. 5교시에 결석하는 건 주인공이 아니었나요? 선생님이 실수하신 모양이니 이따 말씀드려야겠네요. |
문학 교과서
문학 교과서의 중간에 책갈피가 꽂혀 있습니다. 책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띕니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라는 수필집 속 문장이었죠. ‘책은 책과 아직 책으로 쓰인 적 없는 것들(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해서)을 연결하게 합니다.’ 밑줄쳐진 문장 옆, 노란색 포스트잇이 눈에 띕니다. 단정한 글씨체는 교실에 붙어 있던 것과 같아요. ‘믿어.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 포스트잇을 떼어내면 꾹꾹 눌러쓴 자국이 손 끝에 만져져요. 꼭 확신에 차 말하는 것 같은 문장입니다. 그 눌러쓴 자욱이 손 끝에 닿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입니다. |
체육 선생님 자리
체육 선생님의 자리에는 운동 도구와 출석부, 그리고 호루라기가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습니다. 도통 정리와는 거리가 먼 성격인게 한눈에 보여요. 선생님은 식사하러 가신 모양인지 자리에 계시지 않네요.
체육 선생님의 책상 위를 바라보는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저 선글라스, 멋지네요. 못 보던 건데, 체육 선생님이 새로 선글라스를 사셨나봐요. 탐사자의 눈에 책상 한쪽에 놓인 선글라스가 보입니다. 그런데 선글라스가 맞나요? 불투명하지만 유리에 가까운 재질이라 햇빛을 차단하지 못할 것 같은걸요. 그런 생각을 하며 선글라스를 바라보면, 깜빡. 선글라스의 유리 위로 아주 검고 기괴하게 생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무언가가 형체를 알아보기도 전 스쳐지나갑니다.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음에도 순간 등 뒤에 소름이 돋아요.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가 비쳤던 걸까요? 이상한 것을 본 탐사자, 이성 판정(0/1). 실패: 저 선글라스, 멋지네요. 못 보던 건데, 체육 선생님이 새로 선글라스를 사셨나봐요. 탐사자의 눈에 책상 한쪽에 놓인 선글라스가 보입니다. 그런데 선글라스가 맞나요? 불투명하지만 유리에 가까운 재질이라 햇빛을 차단하지 못할 것 같은걸요.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을 마저 둘러보면, …어라? 선글라스가 하나 더? 그럼 저건 뭐죠? |
(※KP 정보: 히든 루트로 가는 방법입니다. 이 선글라스는 렝의 유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차원의 부랑자가 차원을 이동하며 생긴 틈새로 다른 차원을 떠돌던 선글라스가 KPC와 함께 이 학교에 떨어졌습니다. 현재는 체육 선생님이 주워 갖고 있으며, 관찰 판정에 성공한 탐사자가 이 선글라스를 통해 본 건 차원의 부랑자입니다.)
미술 선생님 자리
“탐사자? 무슨 일이니?”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선생님이 탐사자를 보고 반갑게 인사합니다. 방금까지 서류를 작성하시던 중인가봐요. 노트북의 흰 화면에 커서가 깜빡이는 게 눈에 띕니다.
“교무실에서 널 본 건 처음이네. 그러고보니 오늘 오전에 옆 반에 도둑이 들었단 말 들었니?”
모를 리가 있나요. 그 사건을 조사하는 게 주인공의 이야기였는걸요. 탐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 미술 선생님은 말을 잇습니다.
“듣기로는 도둑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더라.”
“글쎄… 체육관 옥상의 수영장에 뛰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지 뭐야?”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덧붙이면서요. 아이들이 더위를 먹은 것 같다며 웃는 미술 선생님은 탐사자에게 인사하고 교무실 바깥으로 나섭니다. 수영장에 빠진 사람이 그대로 사라졌다니, 참 이상한 일이죠.
(※KP 정보: 엔딩 1의 단서입니다. KPC가 떨어지며 탐사자의 세계는 불안정해졌습니다. 이전과 같을 수 없고 미완으로 남은 세계가 되었으니까요. 그 결과로 학교 속 수영장에 차원의 틈이 생겼으며 아이들이 목격한 모습은 차원의 틈 너머로 떨어진 도둑의 모습입니다.)
도서관
도서부원 몇만이 남아 있는 작은 도서관은 한적하고 조용해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라 그럴까요. 도서관은 유난히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업 내내 책을 읽던 KPC라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탐사자도 가끔은 이곳에 와서 책을 읽기도 했었습니다. 모난 시선들과 힐난하는 손가락질을 피해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는 커튼 아래,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진 자리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마음이 편안해졌으니까요.
역시나 예상대로 KPC는 도서관에 들어서자 안색이 밝아집니다. KPC가 책을 둘러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자는 생각이 들어요. KPC가 도서관을 구경하는 동안 탐사자는 서가에 놓인 책들을 바라봅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KP 정보: 성공/실패 상관 없이 다음과 같은 지문을 출력해주세요.)
서가에 놓인 책들 중 하나가 반짝, 책등이 빛납니다. 새하얗고 제목조차도 없는 책이에요. 이런 책이 도서관에 있었던가요? 펼쳐든 책 속에는 아무 문장도 쓰여 있지 않아요. ……아니, 쓰여 있습니다. 쓰이고 있어요. 이게 무슨 일이죠? 백지였던 책에, 계속 새로운 문장이 쓰이고 있습니다.
‘탐사자는 소설을 읽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탐사자가 본 소설 속 문장은 탐사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탐사자는 생각했다. 이게 뭐야?’
탐사자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쓰이는 문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덧 KPC가 다가오며 탐사자를 부릅니다. 그리고 책에도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집니다.
‘그 때였다. KPC가 탐사자에게 다가오며 탐사자를 불렀다.’
…이 소설, KPC와 탐사자에 대한 이야기인 건가요? 그렇다면 이 책이 어떻게 소설 안에 있을 수 있죠? 낯설고 기이한 경험을 한 탐사자, 이성판정.(0/1)
(※KP 메모: 두 사람이 등장하는 새 소설입니다. 이 흰 책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후 책을 다시 펼쳐보거나 살펴본다면 KPC와 탐사자의 행동을 묘사해주세요. KPC에게 내용이 읽히냐 물으면 모른척해주세요. KPC는 외부 세계의 인물이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체육관
체육관에는 점심을 서둘러 먹고 온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음 시간을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그러고보니 탐사자, 5교시는 체육시간이었죠. 5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와야겠어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 고개를 돌리면, 친구들은 당신과 KPC를 번갈아보다 저들끼리 무언가 소곤거리고 자리를 피해요. 보나마나 당신에게 새로 부여된 KPC와의 서사를 질투하는 걸 겁니다. 체육관 1층 가장 안쪽에는 사물함이 있고, 옥상에는 수영장이 있어요.
수영장
찰랑이며 흔들리는 물살은 수영장 바닥의 파란색 페인트 덕에 더욱 시원해보입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이 곳에서 수영 강습이 진행될 거라고 들었어요. 정작 방학이 오기 전 소설이 끝나는 바람에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지만 한번쯤은 시원한 물에 뛰어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습니다. 수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살이 희게 빛나요. 탐사자, 지능 판정.
성공: …찰랑거려요? 탐사자는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순간 위화감에 휩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왜 수영장의 물이 흔들리고 있죠? 마치, 안에서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 실패: …찰랑거려요? 탐사자는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순간 위화감에 휩싸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름이 돋아요. 수면 위에 비치는 탐사자의 얼굴이 물결을 따라 잔상처럼 퍼지며 수십, 수백 개의 탐사자의 얼굴로 조각나 일그러져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수면을 바라보면… |
탐사자, 이어서 강제 관찰 판정.
성공: 수영장 가장 깊은 곳, 바닥에서 반짝이는 흰 빛을 발견합니다. 저게 뭐죠? 저도 모르게 탐사자의 몸이 앞으로 기울면, 그 흰 빛이 비치는 틈 사이로 작게 갈라진 수영장 바닥이 보입니다. 그 밑에 있는 건, ……아. 끝도 시작도 보이지 않는, 그저 새까맣고 새까만 텅 빈 공간이에요. 빠지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언제부터 저 곳에 있었는지 모를 광활한 빈 공간. 본능이 외칩니다. 저 곳에 빠지면 끝이야.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탐사자, 이성 판정(1/2). 실패: 수영장 가장 깊은 곳, 바닥에서 반짝이는 흰 빛을 발견합니다. 저게 뭐죠? 저도 모르게 탐사자의 몸이 앞으로 기울면, 그 흰 빛이 비치는 틈 사이로 작게 갈라진 수영장 바닥이 보입니다. 반짝이는 흰 빛은 그곳에서부터 비치고 있는 것 같아요. 몸을 기울여 그곳을 바라보려는 찰나, 누군가 탐사자를 부릅니다. KPC입니다. 다시 수영장 바닥을 바라보면, 어라? 아까 보이던 바닥의 틈새는 어디로 간 거죠? 조금의 미동도 없는 푸른색의 수영장 바닥만이 탐사자를 반길 뿐입니다. 의아한 일에 탐사자, 이성 판정.(0/1) |
가장 안쪽 사물함
그러고보니 이 곳은 도둑이 훔친 물건을 숨겨둔 곳이었죠. 소설 속 도둑은 교장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선의로 훔친 거라고 주장하지만, 도둑은 도둑이죠. 주인공은 지금쯤 빈 교실에서 그를 마주하고 바쁘게 이 곳으로 쫒아오고 있어야 할겁니다. 그게 이 소설의 점심 시간 즈음의 장면이니까요. 그리고 사라져버렸다는 도둑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말이 정말이라면 누군가는 도둑의 역할을 대신해줘야 합니다.
…그렇지만 혹시 몰라요. 이야기가 바뀌고 도둑이 사라졌다면 이 안의 카메라는 무사한 걸까요? 그가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잠깐만 확인하면 될 거예요. 아주 잠깐입니다. 제자리에 있는지만 확인하고 돌려놓으면 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며 사물함을 열면…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카메라는 보이지 않아요. 대신 작고 노란색의 포스트잇이 하나 남겨져 있어요. 포스트잇 위 단정한 글씨체가 눈에 띕니다.
‘소설 바깥으로 도망친 등장인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라지는 걸까?’
포스트잇을 보고 있자면,
“탐사자, 너 거기서 뭐해?”
불현듯,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주인공과 친구들이 있어요. 주인공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그의 옆에 선 모르는 아이의 손에는 텅 빈 카메라 가방이 들려 있어요. …설마 주인공이 카메라를 찾으러 온 건가요? 지금? 그렇지만 도둑은 사라졌을텐데요. 주인공은 아까 선생님에게 말해본다고 했었고…,
당신이 서 있건 말건 주인공과 친구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가와 사물함을 바라봅니다. 당신이 사물함 속 카메라를 알고 있다면 주인공과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타이밍이 좋지 않습니다. 하필 사물함이 텅 비었을 때 주인공과 마주치다니요. 굳은 표정으로 당신을 돌아보는 주인공이 말합니다.
“카메라 어디갔어?”
도둑 취급을 받는 기분은 썩 즐겁지 않습니다. 당신과 KPC를 둘러싼 친구들의 모습에, 저들끼리 떠들며 몸을 풀던 아이들의 소란스럽던 대화들은 어느새 잦아들었습니다. 체육관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탐사자에게 향합니다. 체육관은 어느덧 숨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고요합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표정에 묻어난 감정은 화였을까요. 혹은 배신감이었을까요.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당신은 악역이었고 주인공과 대립해왔잖아요.
“이젠 네가 도둑이 되기로 한 거야? 그 안에 비리의 증거가 있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서 오늘 범인을 찾는 걸 반대한 거야?”
“…아, 아닌가. 이번엔 네가 카메라를 찾아서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어?”
“그건 주인공의 일이잖아?”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가 신경을 긁어요. 단정하는 듯한 주인공의 태도는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당신은 악역이지 악인은 아닌걸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탐사자가 카메라를 훔칠 이유는 없다는 걸 알 수 있을텐데요. 그러나 주인공은 이미 당신을 도둑으로 단정지은 듯 말합니다. 배역일 뿐인데. 그저, 당신이 악당인 건 주인공의 대척점에 선 사람이라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주인공은 오늘 내에 카메라를 찾아서 돌려놓으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섭니다. 입안이 씁쓸하고 속이 울렁거려요. 운동장 한 켠에서 울던 친구의 당신의 머릿속에 아른거립니다. 그 아이 역시 이런 기분이었나요.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운동장
이쪽, 저쪽. 바쁘게 서로에게 공을 패스하는 사람들은 더위도 잊은 듯 쉴새없이 움직입니다. 그늘 하나 없이 내리쬐는 햇살 아래, 덥지도 않은지 크게 외치고, 소리치는 목소리엔 활기가 넘쳐요. 찐득하니 더운 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운동하는 건 썩 즐겁진 않아보입니다. 예? 아니라구요? 그래요, 탐사자가 운동을 좋아한다면 색다른 경험이 되겠죠.
“여기! 나한테 보내! 야!”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공을 제게 달라는 듯 손짓합니다. 그는 탐사자와 KPC의 근처에 서서 골대와 공을 받은 주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어요. 잠시 망설이던 주자는 곧 재빠르게 몸을 돌려 수비수들을 피하곤 공을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년을 향해 찹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방향이 잘못되었잖아요. 그쪽은 KPC라구요!
어긋난 방향으로 차여진 공은 정확히 KPC를 향합니다. 너무 가까워서 피할 시간조차 없어보여요. 이대로라면 KPC가 맞고 말겁니다. 날아오는 공을 좇아 놀란 눈으로 KPC를 바라보면 KPC 역시 얼음장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빠르게 날아오는 공은 KPC를 향해, KPC를 지나쳐… KPC를 통과해 담벼락에 부딪치고서야 멈춥니다.
“타임! 야 넌 어떻게 패스 하나도 못하냐!”
운동장에서 야유와 가벼운 힐난이 쏟아지고,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탐사자와 KPC 옆을 지나쳐 공을 주워와요. 그는 방금의 일은 못 봤다는 양 태연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탐사자, 분명히 봤잖아요. 저 공은 KPC를 통과했습니다. 되물어보아도 소년은 그런 것은 본 적 없다며 오히려 탐사자를 이상하게 바라볼 뿐이에요.
(※KP 메모: 소설 속 등장인물이자 소설 바깥 세상의 인물이기도 한 KPC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KPC는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소설에 없는 사람’이니까요. 사람이 없는데, 공이 통과한 게 이상한 일일까요? 그러나 KPC와 서사가 연결된 탐사자에게라면 다를 일입니다. 탐사자에게는 엄연히 ‘소설에 존재하는’ 사람일테니까요. 탐사자를 제외하면 KPC의 이상한 점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가장 뜨거운 햇볕 아래, KPC와 탐사자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이 이상한 여름날도 벌써 절반이 흘러가고 있어요.
(※KP 메모: KPC는 방금의 일로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앞서 점심시간의 조사를 토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전개가 다르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4. 세 번째 페이지, 체육 시간
(추천 BGM: 시도 강(Tido Kang) - 하늘의 빛 / https://youtu.be/Z8FT67j2iiE )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찾아온 5교시입니다. 열기 오른 땅을 피해 숨은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박히고, 나뭇잎조차 햇살을 막지 못해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요. 가만히 서 있어도 등 뒤로 땀이 흐를 것 같은 더위에 숨이 막히기도 해요. 이런 날씨, 이런 시간에 체육 수업을 배정한 사람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다행이라면 오늘 수업은 체육관에서 진행될 거라는 사실일까요?
되돌아온 교실에는 각자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들 체육관으로 향했는지, 교실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탐사자도 수업을 듣기 위해서 어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겁니다. 교실과 체육관은 거리가 조금 있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어요.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탐사자, 아이디어 판정.
성공: 그러고보니, KPC. 그는 체육복이 있을까요? 오늘 전학 왔으니 챙겨왔을리 만무할텐데요. 오늘 체육 시간엔 농구를 배운다고 했던 것 같은데… 교복을 입고 하기엔 불편하지 않을까요? 실패: 그러고보니 오늘 체육 시간에는 농구를 배운다고 했던가요? 체육복을 입지 않고 하기엔 불편하겠네요. 체육복을 챙겨오기를 잘 한 것 같아요. |
(※KP 정보: 탐사자의 아이디어 판정 실패시 KPC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탐사자에게 체육복이 없다고 넌지시 말해주세요.)
이 학교의 체육선생님은 엄하신 분이라, 오늘 전학온 KPC라고 해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 체육 시간엔 농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요. 땀에 젖어 들러붙은 교복을 입고 남은 수업을 듣는다면 분명 찝찝하고 불편할 거예요. 어쩌죠, 탐사자? KPC를 위해 누군가에게 체육복을 빌려오는 건 어때요? KPC는 오늘 전학왔으니, 다른 반 친구가 있을리 만무한걸요.
(※KP 정보: 탐사자가 교복을 빌려오는 동안 KPC는 교실에서 기다리겠다고 해주세요. KPC는 탐사자가 없는 동안 소설을 다시 읽으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왜 달라졌는지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KPC가 갖고 있는 소설과 다른 소설이 되어버렸으므로 KPC는 결코 책을 통해 단서를 찾아낼 수 없고, 또한 점차 소설의 인물로 동화되어 가고 있으므로 현실에서의 KPC라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체육복을 빌리려는 탐사자, 행운판정 내지 대인판정.
(※KP 메모: 실패시 체육복을 빌리지 못하고 KPC가 체육 선생님께 혼이 나지만, KPC를 위해 체육복을 빌려와주려는 의지만 있다면 탐사자가 체육복을 빌려올 수 있게 해주세요. 탁의 자율에 맡깁니다.)
손 안에 폭신한 체육복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시큼털털하고 더운 공기 속 옷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다행입니다. 조금 수업에 늦겠지만, KPC의 체육복을 빌리기 위한 거였으니 선생님도 이해해주실 거예요.
어느덧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복도는 조용히 옆 반의 수업 내용만 간간이 문 너머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탐사자 혼자만의 걸음 소리가 텅, 텅, 초록색으로 거칠게 페인트칠 된 복도를 휘감아도네요. 이렇게 조용한 복도는 조금 낯선 기분이 듭니다. 이 시간의 탐사자는 늘 체육관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고, 홀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탐사자가 아닌 주인공이었을테니까요. 꼭 탐사자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어느덧 탐사자의 발걸음은 다시 교실 앞입니다. KPC는 교실 안에 있는 모양인지 교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탐사자?”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던 KPC가 인기척에 등을 돌립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넘어가요.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고,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등진 KPC의 앞에 길게 그늘이 집니다. 팔락이는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크게 들려요.
아, 다시금 저 멀리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메아리처럼 끝을 알 수 없이 울리는 매미 울음소리는 여름의 시작.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더운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탐사자의 몸을 감싸돌아요. 햇빛에 눈이 따가워 그늘진 KPC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 이렇게 날이 더워진 걸까요. 탐사자의 등 뒤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립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답답할 만치 더운 공기가 탐사자의 숨을 막히게 만듭니다.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핑, 현기증이 도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햇볕에 시야가 어지러워진 탓일까요? KPC의 주변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초록색, 파란색, 검은색, 노란색의 선으로 이루어진 노이즈가 KPC의 곁에서 일렁여요. 선명하게 보이는 교실 풍경 속 그만이 불분명하게 형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움직임이 영화의 프레임처럼 느리게 끊겨 눈에 들어옵니다. 꼭, 여러장의 종이를 이어붙인 스톱모션처럼요. 그 모습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사실적이지 못해 위화감이 듭니다. 그러나 눈을 깜빡이면 다시 보이는 건 평범히 햇볕을 등진 KPC의 모습입니다. 이상한 경험에 탐사자, 이성 판정(2/3). 실패: 햇볕에 시야가 어지러워진 탓일까요? KPC가 유독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요. 선명하게 보이는 교실 풍경 속 그만이 불분명하게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일렁여요. 핑, 짧게 현기증이 듭니다. 검게 물드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면 다시 보이는 건 평범히 햇볕을 등진 KPC의 모습입니다. 이상한 경험에 탐사자, 이성 판정(2/3). |
“탐사자?”
KPC의 목소리가 몇 개의 벽을 통과한 것처럼 아주 멀고 흐릿하게 들려요. 웅웅 울려오는 귓속은 물속에 머리를 담근 것만 같습니다. 찾아오는 현기증에 저도 모르게 눈앞이 아찔해져요. KPC를 중심으로 세상이 점차 늘어나는 듯 멀게만 느껴집니다. KPC의 손에서 책이 아주 느리게 떨어져, 빙글빙글 돌고, 바닥에 쿵, 소리내며 떨어집니다. 이건, 마치…
“탐사자!”
더위 때문이었던 걸까요? 웅웅 울리던 머릿속은 KPC의 목소리에 맑아집니다. 정신을 차리니 KPC가 놀란 눈으로 당신을 붙잡고 있어요.
(※KP 메모: KPC 역시 탐사자와 비슷한 현상을 겪었습니다. 둘의 세계가 통합되는 과정으로, KPC는 PC의 등 뒤로 틈이 생기고 그 틈 사이로 탐사자가 멀어지고 작아지며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탐사자의 안색을 살피는 KPC의 낯빛은 좋지 않습니다. 방금 본 건 뭐였을까요? 아무래도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탐사자? 농구 경기 도중 현기증이라도 다시 느낀다면 공에 맞을 지도 몰라요. KPC는 탐사자에게 체육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올테니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말을 건네곤 교실을 떠나요. KPC가 떠난 교실에 홀로 남은 탐사자의 시야 끝, KPC가 들고 다니던 책이 바닥에 떨어진 게 보여요. 위로 펼쳐진 책을 주워 들어 빼곡하게 검게 쓰인 글씨들을 바라봅니다.
초록색, 검은색, 파란색, 노란색. 다시 초록색, 검은색, 파란색, 검은색, 노란색.
현기증이 다 낫지 않은 걸까요. 책의 글씨 주변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일렁여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면, 책의 글씨가 위아래로 춤추듯 꿈틀거리다 점차 흩어집니다. 시선을 떼고 싶어도 책의 문장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탐사자의 시선을 끌어요. 보고 싶지 않음에도 탐사자의 눈에 책의 내용이 각인처럼 박혀 들어옵니다.
‘…그는 복도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도둑을 쫓아 뛰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도둑인게 틀림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오늘 아침 자신을 비웃던 탐사자를 생각했다. 교실 가장 뒷줄 창가자리에 앉아, 지각을 간신히 면한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던 탐사자의 모습을. 그리고 그는 동시에, 생각했다. 도둑을 잡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던 탐사자의 모습을. 하지만 탐사자, 이거봐. 정말로 도둑을 잡을 수 있다고! 그는 속으로 되뇌이며 빠르게 뛰어가는 도둑을 좇아 체육관으로…’
……이 이야기. 익숙하지 않나요?
당신과 주인공의 이야기잖아요. 5교시 즈음, 도둑을 발견하고 체육관으로 뛰어가는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도둑이 체육관 가장 안쪽 사물함에서 카메라를 찾으려다 주인공에게 들키는 장면까지.
이게 어째서 KPC의 책에? KPC가 아까 이 소설을 읽고 있었잖아요. 오늘 하루종일 품에 들고 다니던 소설인걸요. 그럼 KPC는 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나요? 당신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는 어디까지 당신에 대해,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요? 자신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 등장인물이라뇨. KPC는 등장인물이 맞긴 한가요?
♪♫♪-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매미 울음 소리에 파묻혀 작게 울려퍼집니다. 당신의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KP 메모: 지금부터 KPC는 탐사자가 물어볼 경우 진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상으로 KPC가 진상을 공개하는 건 하교시간이나, 고정된 사항이 아닙니다. 또한 체육시간 이후 하교시간으로 설정해두었으나 필요하다면 탁에 맞추어 수업을 추가해주세요.)
5. 네 번째 페이지, 하교 시간
(추천 BGM: 소뇨 - 달콤한 거 주세요 )
종례사를 하는 선생님의 말소리가 귓가에 멀게만 들려옵니다. 하교시간이 다가와 신난 아이들의 수다 떠는 소리도, 당신과 KPC를 번갈아보며 소곤거리는 친구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주의를 주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복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먼저 끝난 아이들의 발소리도 탐사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에요. KPC에 대해 알아갈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입니다. 이것마저 소설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탐사자가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이번 이야기에서 탐사자는 어떤 역할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걸요.
탐사자가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 선생님이 교탁 위에 놓인 출석부를 들고 몸을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 교실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와 정신이 듭니다. 벌써 종례사가 끝난 모양이네요. 시야 끝에 선생님을 따라 나가는 주인공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는 아마도 선생님께 오늘 점심 시간의 일을 말하려는 듯 해요. 당신이 잘못한 건 없지만 짜증이 치밀기도 합니다. 이 어지러운 하루가 내일도 반복될까요? 오늘처럼 내일은 내일의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탐사자는 무엇을 해야하죠?
하교하기 위해 가방을 싸고 있으면 KPC가 어느덧 탐사자의 옆으로 다가옵니다.
“탐사자,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을래?”
KPC와 나란히 집으로 향합니다. 끄트머리부터 푸르게 물들어가는 하늘은 점점히 밝은 별이 뜨기 시작하고 있어요.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노란 빛을 머금은 구름이 별을 향해 흘러갑니다. 찌를 듯 뜨겁던 더위도 어느덧 한풀 꺾이고, 소란스럽던 학교는 뒤늦게 하교하는 아이들의 간간히 대화하는 목소리를 제외하면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찌르릉, 자전거를 타고 가는 누군가의 벨소리, 더위를 피해 숨어 있던 벌레들의 작은 울음소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의 엔진 소리, 그리고 그 속을 가로지르는 미지근하고 뜨거운 바람에 섞인 풀내음. 여름 내음. 늘상 홀로 걷던 하교길이기에, 무감각히 흘려보내기만 했던 순간들이에요. 분명 익숙하디 익숙한 풍경이, 오늘따라 새롭습니다. 단지 KPC라는 이름이 곁에 덧붙었다는 이유 하나로.
“탐사자. 너는 책을 좋아해?”
KPC가 문득 탐사자에게 묻습니다. KPC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합니다. 모든 소음과 공기 속에서 너의 목소리만은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요. 고개를 돌리면 KPC는 탐사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에 담긴 건 탐사자 뿐이에요. 처음 마주칠 때처럼.
“탐사자.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알고 싶었어.”
(※KP 메모: KPC와 탐사자의 RP를 위한 구간입니다. 탐사자가 진상에 대해 묻거나 KPC가 바란다면 진상을 밝혀도 좋습니다.)
손끝에서 흩어지는 여름 바람이 당신과 KPC 사이를 휘감아 돌아 흩어집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여름날의 햇살을 잡으려 해본 적 있나요. 그늘 아래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나뭇잎의 그림자를 더듬으려 해본 적은요? 흐르지 않고 멈춰버린 계절이 언젠가 끝나길 바라본 적은 있나요? 찻잔에 맺힌 이슬 같은 물방울에 산란하는 빛의 파편들을 바라본 적은요?
기울어져가는 노을의 끄트머리가 지평선에 걸려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립니다. 한없이 길어진 너와 나의 그림자 끝이 서로 맞닿아 하나의 끝을 이룹니다. 맺힐 것만 같던 땀방울은 더위에 먹혀 사라지고 맙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너의 목소리. 이 더위 속 찾아온 이방인, KPC.
손 끝에 닿을 듯 닿지 않던 햇볕과 그림자, 잡힐 것 같은 밀도 속 잡히지 않고 흩어지던 습도 머금은 공기. 종이 한 장이라는 아주 얇은 벽과, 뻗어도 닿지 않던 손.
그건 아주 멀지만도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KPC, 네가 그런 사람이었고, 네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을테니까요.
이명과 같던 매미소리가 잦아드는 만큼, 찌르르, 작게 울려퍼지는 벌레 소리가 점차 그 자리를 메웁니다. 시야의 끝, 이제는 완전히 파란 빛에 잠식된 하늘 위로 반쯤 기울어진 달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잠깐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지고, KPC는 당신의 집앞까지 걸어와 배웅해주고 돌아섰습니다. 조금씩 멀어지는 그의 모습만큼 태양을 마주본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탐사자의 앞에 드리워요. 당신의 발치에 어른거리며 당신의 발을 덮을 듯, 닿을 듯 하던 그림자는 점차 흐려지고 흩어져 사라집니다. 내일도 KPC는 학교에 올까요? KPC는 내일도 당신의 삶의 부분이 되어줄까요? 모든 의문을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KPC와 헤어져 돌아온 집안은 오늘따라 후덥지근하고, 숨이 막힙니다.
6. 한여름밤의 꿈
(추천 BGM:
시도 강(Tido Kang) - 북극성 / https://youtu.be/r23nhfDFjnc )
찾아오는 여름밤의 어둠처럼 피곤이 탐사자의 몸에 조금씩 젖어듭니다. 언제나 하루의 끝이란 피곤과 같이 했지만 오늘은 마치 물 먹은 솜처럼 자꾸만 몸이 축축 처져요.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KPC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다 사라집니다. 창가에서 바라보던 KPC의 모습, 당신을 보고 웃던 KPC의 모습, 책을 읽던 KPC의 미소, KPC의 손끝에서 너덜해지도록 읽혀졌던 소설책, ‘보고싶었어’, 속삭이던 KPC의 입모양.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일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KPC를 설명할 수 없어요. 열병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 하늘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중심을 잡을 수 없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분이에요.
몸이 자꾸 바닥으로 기울어집니다. 누군가 짓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옵니다. 다시금 따가운 매미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습니다. 탐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신은 자꾸만, 자꾸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생각들은 드문드문 끊기다 이윽고 멈춥니다. 시야가 어두워집니다.
…
초록색, 검은색, 파란색, 노란색. 다시 초록색, 검은색, 파란색, 검은색, 노란색.
검게 물든, 흑백의 세상에서 탐사자는 눈을 뜹니다. 마치 물속을 부유하는 것처럼 중력이라곤 느껴지지 않아요. 이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들리지 않고, 탐사자의 주변에 서 있는 건물들은 건물처럼 길게 늘여진 커다란 글씨들의 뭉텅이에요. 쭉 뻗은 곧은 길도,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도, 모두 하나같이 자글자글, 글자들이 벌레처럼 겹쳐 일그러져 있습니다. 탐사자가 손을 대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부서집니다.
흩어지는 건 글자들 뿐이 아닙니다. 탐사자의 손이 그것들에 닿을수록, 탐사자 역시 손이 점차 각지고, 짧아지고, 글자들이 물들다 색을 잃으며 아주 작고 잘게 부서지기 시작해요.
흔들리는 발걸음은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앞으로 향합니다.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탐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모자이크처럼 덧대여진 글씨들의 조합은 위아래로 아주 느리게 춤을 추듯 움직입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툭, 탐사자의 발치에 무언가 걸려 채입니다. 가볍게 땅을 구르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숙이면, …저건 체육 선생님의 새 선글라스? 실패: 툭, 탐사자는 미처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해 무언가를 밟고 넘어집니다. 탐사자, 체력 -1. 탐사자의 발치에 걸린 물건 역시 가벼운 소음을 내며 저만치 굴러가요. 아픈 무릎을 뒤로 하고 굴러간 물건을 확인합니다. …저건 체육 선생님의 새 선글라스? |
선글라스를 주워듭니다. 선글라스의 유리가 유난히 푸른 빛을 띄어요. 선글라스의 알을 바라보면 그 속에는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군데 군데 종이가 찢겨진 것처럼 검게 물든 모습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선명한 하늘에는 구름이 그린 것처럼 그 위를 떠다니고 있어요.
반짝.
선글라스 유리 위로 무언가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비칩니다. 탐사자, 관찰판정.
성공: 선글라스의 유리알 위로 스쳐지나가는 건 낮에 본 검고 기괴하게 생긴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KPC? 괴물이 날이 선 손으로 길게 허공을 헤집으면 마치 종이를 찢는 것처럼 여러겹의 틈이 만들어집니다. 하나가 아니에요. 그 괴물의 주변엔 비슷하게 생긴 찢겨진 자리가 가득합니다. 괴물이 그 속으로 뛰어들고, 넓어진 틈새를 향해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KPC는 휘청이다 끌려들어갑니다. KPC가 끌려들어간 틈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과 푸른 수영장의 풍경이 언뜻 보여요. 투명하고 차가운 물방울이 몇 방울 튀어오릅니다. 실패: 선글라스의 유리알 위로 스쳐지나가는 건 낮에 본 검고 기괴하게 생긴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KPC? 괴물이 날이 선 손으로 길게 허공을 헤집으면 마치 종이를 찢는 것처럼 여러겹의 틈이 만들어집니다. 괴물이 그 속으로 뛰어들고, 넓어진 틈새를 향해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KPC는 휘청이다 끌려들어갑니다. 투명하고 차가운 물방울이 몇 방울 튀어오릅니다. |
(※KP 정보: 엔딩 1, 히든 엔딩의 힌트입니다. PC가 본 건 KPC가 끌려들어갈 당시의 모습이며, 차원의 틈새는 아직 닫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틈은 렝의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렝의 유리로 된 선글라스가 있으면 차원의 틈새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괴물의 칼날 같은 손에 찢겨진 자리는 KPC를 삼키고서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어요.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틈새는 커녕 보이는 건 사람 하나 없이 바스라들고 있는 글자들 뿐입니다. 저 푸른 물결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끝맺기도 전, 탐사자가 서 있는 바닥이 세차게 흔들립니다. 지진인가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겹치고 덮여 있던 글씨들의 조합이 한순간에 산산히 흩어지고, 끝없이 희고 흰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으면…
♫♪♫-
아침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탐사자를 어지럽힙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알람을 끄려 손을 뻗으면, 툭. 무언가 손 끝에 걸려 가볍게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 안에 잡히는 네모난 무언가를 들어보면… 선글라스?
오늘도 또다시, 찾아온 아침입니다.
7. New Page?(추천 BGM: 시도 강(Tido Kang) - See you / https://youtu.be/fDtJnpXVUaU + 닐케이 - 여름방학 )
♫♪♫-
조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던가요. 당신에겐 익숙하겠죠, 이 첫 장면? 그래요. 어제와 똑같은 시작입니다.
열린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당신의 뺨을 간지럽힙니다. 흰 커튼이 바람을 따라 펄럭여 당신의 시야에서 아른거려요. 아직 초여름인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해 목 뒤에 땀이 흐릅니다. 교실은 차분하고 조용해서 벌써 수업이 시작한 것 같아요.
어제의 그 소란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시작됐죠. 아직 KPC는 등교하지 않았고, 주인공도 마찬가지에요. 손끝에 걸리는 선글라스의 가볍고 매끈한 촉감만은 어제의 일이, 그리고 그 꿈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는 듯 합니다.
오늘도 주인공은 지각을 간신히 면할까요? KPC는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주인공과 부딪칠까요? 어제의 꿈은 도대체 뭐였을까요? 열린 문 너머로 복도를 걸어오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립니다. 저건 분명 선생님의 발소리겠죠. 탐사자의 하루는 분명히 바뀌었는데,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그대로예요. 자연스럽게 탐사자의 시선은 뒷문으로 향합니다. 탐사자, 지능 판정.
성공: 탐사자, 원래 이 시간에 교실이 조용했나요? 어제는 친구들 중 하나가 문 앞에서 선생님이 오는지 보고 있었잖아요. 칠판에 낙서하면서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은요? 그대로인 건 교실이 아니라 탐사자의 행동이잖아요. 심지어 주인공은 아직 등교하지도 않았어요. 실패: 그러고보니 뭔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네요.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만요. 문이 열리기를 어제와 똑같이 기다리고 있지만, 문이 열리진 않네요. 왜죠? |
탐사자, 이어서 관찰 판정.
성공: 뒷문에 붙은 파랑색 포스트잇이 눈에 띕니다. 포스트잇의 끄트머리가 팔랑거리네요. 어제와 똑같이, 똑같은 자리에, 색만 다르게. 자세히 보기도 전,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패: 나부끼는 커튼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요. 뒷문에 뭔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노란색? 아니, 파란색인가요? 초록색일지도 모르죠. 자세히 보기도 전,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
뒷문의 포스트잇을 살펴볼 경우
‘뭔가 잘못됐어. 이건 내가 알던 내용이 아니야.’ 어제보다 휘갈겨 쓰여졌지만 여전히 단정한 글씨체가 이제는 눈에 익어요. KPC의 필체입니다. KPC가 쓴 것일까요? 어제와 달리 포스트잇이 매끈하고 빳빳한 게, 꼭 새 것 같습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KP 메모: 관찰 판정 내지 뒤집는다는 행동으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포스트잇의 뒷장을 살펴봅니다. 같은 글씨체로 이번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주인공이 사라졌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누구야?’ |
앞문이 열리는 소리는 분명 선생님의 것일 겁니다. 오늘은 주인공이 좀 늦네요. KPC는 주인공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어제와 같은 하루를 반복해야 한다면 주인공이 들어올 때 KPC도 맞춰 들어와야 하니까요.
뚝.
한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집니다.
선생님의 규칙적인 발소리도, 교탁 위에 출석부를 올려놓는 소리도, 아이들의 대화 소리도. 낡은 나무 의자가 가끔 끼익, 기분나쁘게 뒤틀리는 소리도. 창밖의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습니다. 진공 상태처럼 그 어떤 소리도 없이, 웅웅, 귓가를 울리는 정적만이 가득합니다. 탐사자는 주변을 둘러봅니다.
‘소년, 주인공, 그는 서 있었다, 시끄러이, 여름, 말할 수 없는, 차가운, 질투나, 나도 이야기를 줘,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우리의 이야기를 써줘’….
수많은 글자들이 겹치고 겹쳐 있는 교실은 오로지 탐사자 뿐입니다. 교탁도, 책상도,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 형태들도 모두 색을 잃고 초록색, 검은색, 노란색, 푸른색 글자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되어 멈춰 있어요. 거대한 타이포그라피 같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입니다. 탐사자가 어제 꾼 꿈 속의 세상처럼. TV의 노이즈 화면처럼 모이고 흩어지며 일그러지는 글자들의 형태를 바라보고 있으면, 글자들이 점차 탐사자에게 손을 뻗고…
(※KP 정보: 소설의 세계가 무너지며 일어나는 일입니다. KPC와 PC의 소설 속 주인공은 두 사람이므로, 주인공을 시기해 이야기를 뺏고 싶은 등장인물들의 욕망이 문장에 투과되고 있습니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글자들이 부서져내리기 시작합니다. KPC입니다. 그는 뛰어온 듯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어요.
(※KP 정보: KPC는 주인공이 달려오다 교문 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봤고, 놀라서 사라진 주인공을 찾아다니다 수업에 늦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사라지며 KPC는 점차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소설에 잡아먹히기 시작해 소설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KPC 역시 바스라드는 글자의 형태들과 당신을 번갈아 봅니다. 당신과 KPC의 시선이 마주하면, 저 멀리서 기적 소리처럼 매미 울음 소리가 점차 크게 메아리칩니다.
“탐사자?”
“KPC?”
매미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아 귀가 아프게 느껴질 즈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글자들이 부서지고 무너진 자리엔 다시 평소의 교탁과 의자, 책상이 놓여 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모습도, 친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텅 빈 교실, KPC와 탐사자만 있는 이 곳에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지각했으면서 왜 거기에 멍하니 서 있니, KPC? 어서 자리에 가서 앉아라.”
“탐사자 너도 KPC 말고 선생님을 보렴. 오늘 도서관 당번은 탐사자인 거 잊지 마라.”
도서관 당번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요. 두 사람을 가볍게 타박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면 KPC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요. 소리를 좇아 귀를 기울여봐도 도통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곳곳에서 KPC와 탐사자의 이름을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뭉개지고 흩어져 뭐라고 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KPC는 여전히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요. 이마저도 어제와 같아요. 다른 점이라면, 그 역시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걸까요. 아무래도 이 이상한 상황은 KPC와 탐사자에게만 느껴지는 것 같죠.
♪♫♪-
불규칙한 잡음이 섞인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분필을 드는 소리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수업의 시작을 알립니다. 당황스러움을 뒤로 하고 수업을 들을 준비를 합니다.
그러고보니, 뭔가 이상한데…
아. 주인공.
그가 아직도 등교를 하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KP 정보: 소설의 주인공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히 의미를 잃고 사라진 등장인물이 되었습니다. 만일 탐사자가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본다면 주인공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오히려 탐사자에게 이상하다는 듯 대해주세요. 이 경우 탐사자, 이성 판정(0/1).)
8. No, It’s Our Page.
(추천 BGM: Flow music - 다시 운명처럼 / https://youtu.be/12oSiCls3pA )
보이지 않는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칠판 위 글씨,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1교시 수업이 끝납니다.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을 리 없습니다. 듣고 싶어도 칠판에 적힌 선생님의 글씨가 보이지 않아 읽을 수 없었는걸요.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은 시끄러워지지만 여전히 탐사자에게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습니다. 텅 빈 교실에 소리만 들린다니, 괴담의 한 장면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번 쉬는 시간에는 생각에만 빠져 있을 순 없습니다. 탐사자가 오늘의 도서관 당번이잖아요. 탐사자는 오늘 하루종일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가 서가 정리를 도와야 할겁니다. 서둘러요, 탐사자. 도서관으로 향해야죠.
탐사자가 도서관으로 향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느덧 KPC도 따라옵니다. KPC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탐사자의 앞에서 몇 차례 망설여요.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또다시 아지랑이가 일렁입니다.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아지랑이 끝이 꼭 부서지는 글자들과 닮은 것 같은 건 착각인가요? KPC에게서 퍼져나간 아지랑이는 아까 본 부서지는 글자들과 닮았어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KPC의 교복 어깨선 일부가 형체를 잃고 글씨의 덩어리로 변해 조각나 깨어지고 있어요. 큰일인 것 같은데요. 실패: KPC의 주변에 아까 본 부서지는 글자들과 닮은 아지랑이가 번지고 있습니다. 그 아지랑이에 닿는 KPC의 어깨가 조각나 깨어지고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요? |
(※KP 정보: KPC가 소설 속에 먹혀 발생한 일입니다. 탐사자는 소설의 이상함을 메타적으로 깨달았으므로 변하지 않지만, 그는 이대로 두면 완전히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다른 친구들처럼 글자와 문장의 형태로 변할 겁니다.)
KPC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어렵사리 털어놓습니다.
“오늘 아침, 주인공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봤어.”
“걔가 어딜 갔는지 모르겠어. 한참을 찾아봤는데 학교 안에는 없었어.”
“…그런데 내가 지금 누가 사라졌다고 그랬지? 오늘 왜 지각했었지?”
KPC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운지 횡설수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드문 드문 주인공이 사라진 순간을 이야기하다 곧 주인공이 누구인지 되묻기를 반복합니다. KPC, 괜찮은 건가요? 정신 차려봐요!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선이 방황하다 탐사자의 손을 잡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뭔가 잘못됐어, 탐사자.”
“같이 있어줘. 여기가 이상해진 걸 눈치챈 건 너 뿐이잖아.”
당신의 손을 잡은 KPC는 어찌할 줄 몰라 퍽,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비칩니다. KPC의 손을 놓으려 해도 그가 꽤 강하게 손을 잡아 쉽사리 빼내어지지 않아요. 이대로라면 쉬는 시간이 다 갈 거예요.
“탐사자, 도서관에 안 갈거야?”
누군가 탐사자를 부릅니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목소리만 들릴 뿐 보이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은 탐사자를 툭 치며, 도서관 서가에 책이 많이 쌓여 쉬는 시간 내에 다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입니다. 도서관 관리는 사서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이 같이 하고 있으니, 이번 시간에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들키고 말 거예요. KPC를 이끌고라도 도서관으로 향해야 할 것 같네요.
(※KP 메모: 탐사자가 KPC 때문에 망설인다면 같이 도서관에 가자고 제안해주세요. KPC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아직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탐사자는 KPC와 서가 정리를 위해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원래도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었지만, 사서 선생님조차 보이지 않는 도서관은 쓸쓸하게 느껴질 만큼 텅 비어 있어요. 도서관 카운터 자리에는 정리해야 할 책이 층을 져 쌓여 있고, 서가는 곳곳이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쉬는 시간 동안 정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던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도서관에 도착해서도 KPC는 여전히 탐사자의 주변에 머무르며 서가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어제 이 곳에 온 KPC의 표정은 지금과 달리 기뻐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보여요. 하지만 KPC는 KPC고 탐사자는 탐사자입니다. 짧은 쉬는 시간이 KPC로 인해 더 부족해졌으니, 어서 책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돌아가야 할 거예요. 서가를 정리하는 탐사자, 관찰 판정.
성공: 서가에 놓인 책들 중 하나가 반짝, 책등이 빛납니다. 새하얗고 제목조차도 없는 책이에요. 이 책은 분명, 어제의……. 탐사자의 시선을 이끄는 책을 꺼내어 읽어보면, 어제와 달리 절반 정도가 빼곡이 쓰여 있는 게 보여요. ‘이상한 일이었다. KPC는 점차 현실과 소설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그는 소설을 현실로 믿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이 끝나지 않았고, 이 소설은 지금 쓰여지고 있으므로. KPC는 책을 정리하는 탐사자를 보며 소설에 갇혀버릴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소설의 제일 첫 장면을 펼쳐봅니다. 이 소설, 분명히 KPC와 탐사자의 이야기예요. KPC가 주인공이 된다면 소설 밖의 그는 어떻게 되는 거죠? KPC가 소설에 갇히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탐사자, 이성 판정(2/3). 실패: 서가에 놓인 책들 중 하나가 반짝, 책등이 빛납니다. 새하얗고 제목조차도 없는 책이에요. 책을 펼치면 일그러들고 부서진 글자들이 와해돼 문장이 되지 못하고 흩어져버립니다. 책을 달아나듯 꿈틀거리는 문장들 속 몇몇의 단어가 눈에 띄어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끝나지 않았고,’ ‘…지금 쓰여지고…’, ‘…갇혀버릴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죠? 이 소설은 분명히 KPC와 탐사자의 이야기입니다. KPC가 주인공이 된다면 소설 밖의 그는 어떻게 되는 거죠? KPC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걸 깨달은 탐사자, 이성 판정(2/3). |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에 탐사자와 KPC의 옷자락이 나부껴요. 주변을 둘러보면 도서관의 그 어느 창문도 열려있지 않아요. 사라락, 사라락. 탐사자의 손에 들린 책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펼쳐집니다. 빠르게 넘어가는 백지 위에 쉴틈 없이 쓰여지는 새로운 문장들이 채워지고, 한없이 넘어가던 페이지는 가장 끝으로 넘어갑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의 백지가 펼쳐지고 나면, 그 위에 단 한 문장이 쓰입니다.
‘KPC와 탐사자의 이야기를 뺏기 위해 무너지는 세계 속 인물들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듣기 싫게 귀를 긁어대는 종소리가 몇 차례 같은 구간을 튕기며 반복되다 끊깁니다. 이윽고 책이 희게 빛나면, 그 빛에 닿은 모든 것이 색을 잃고 우글거리는 글자들의 조합이 되고, 바스라들기 시작해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봅니다. 모자이크처럼 글자로 뒤덮인 도서관은 끝에서부터 점차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9. Run, Run, Run!
(추천 BGM: Flow music - 다시 운명처럼 / https://youtu.be/12oSiCls3pA )
탐사자와 KPC는 도서관에서 도망칩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녹음이 지던 교정은 TV의 노이즈 화면처럼 지직거리고 점이 되어 부서지고 있어요. 단어와 단어가 활자가 되지 못하고 자음, 모음이 되고, 부서지고, 사라집니다. 색을 잃고 검게 물드는 자리들은 KPC와 탐사자를 삼킬 듯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색을 잃고 글자의 파편이 되어가는 복도에는 여지껏 보이지 않았던 친구들과 선생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걸 친구들과 선생님들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사람의 형체로 모인 커다란 블록 같은 자음, 모음의 조합들이 당신을 발견하고 뛰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위에 쓰인 글씨는 쉼없이 새로이 바뀌고 있어요. 그들의 뒤로 교실이, 복도가, 창문이, 운동장의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도 이야기를 줘!’
‘주인공이 되고 싶어!’
‘우리의 문장을 돌려줘!’
쫒아오는 그들의 손이 닿는 곳마다 모두 문장이 되고, 단어가 되고, 기호가 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고개를 돌려 KPC를 보면, …그마저도. KPC마저도 노이즈가 낀 채 지직거리고 있어요. 저들의 손에 잡히면 KPC는 분명 저 수많은 문장들 중 하나가 되고 말 겁니다. 도망쳐야 해요!
우리는 사라지는 문장이 되지 않기 위해, 문장으로 쓰여지지 않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뒤로 스쳐지나가는 학교 복도는 빛을 잃고 수많은 문장이 되어 사라집니다. 세상이 온통 뒤집히고, 뒤엉킨 것만 같아요. 오직 탐사자와 KPC만이 그대로인 이 세상은, 괴상하고 신비합니다.
모든 교실에서, 모든 복도에서, 모든 운동장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뛰어옵니다. 우리를 잡기 위해 문단으로, 문장으로, 자음으로, 모음으로, 색을 잃고 부서져가며 따라옵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서사가 친절했던가요? 이 소설은 주인공을 질투하는 게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우리를 잡으러 뛰어올 리가 없잖아요!
발밑에 사그락 사그락, 낱말이 밟히는 소리가 꼭 책장을 넘기는 소리처럼 들려옵니다. 이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인공이라면. 지금 우리가 도망치는 순간은 새로이 쓰이고 있는 소설의 한 장면일 겁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너와 내가 소설을 벗어나는 줄거리일 거예요.
숨이 턱끝까지 차도록 KPC와 함께 달립니다.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아요. 가만히 멈출 순 없습니다. 이대로 안주하면 다음 장은 쓰여지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결말내야 합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으니까요. 모든 세상이 우리의 이야기를 뺏어가려 할 때, 유일한 조력자이자 주인공인 서로에게 의지해.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페이지를 다시 쓰는 중입니다. 서로를 서로의 주인공으로 삼아, 서로를 서로의 상대역으로 삼아.
푸른 하늘에 별처럼 글자들이 수놓아집니다. 빼곡이 흰 백지를 채우는 글씨는 당신들에게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거세게 흔들리는 바닥은 움푹 꺼지고 패입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죠? 이 이야기의 결말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는 뭘 해야하죠?
탐사자, 관찰 판정.(지능 판정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하단의 지능 판정 지문을 출력해주세요.)
성공: 한순간 탐사자의 시야에 푸른 물결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모래 시계 속 모래알처럼 밑에서부터 흩어지는 체육관의 옥상, 수영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요.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와중에도 수영장의 물결은 푸르게 빛납니다. 실패: 한순간 탐사자의 시야에 푸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려 할 때, 당신의 앞에 커다란 벽이 나타나요. 아니, 벽이 아닙니다. 당신을 좇아오는 글자들이에요! 방향을 바꿔 도망쳐야 할 겁니다. 가장 가까운 건물이… 당신의 눈에 들어온 건, 체육관? |
이어서 탐사자, 지능판정.
성공: 불현듯 어젯밤의 꿈이 떠오릅니다. 검게 군데군데 물들었던 세상, 글자가 되어 부서지던 곳곳, 유난히 푸르렀던 선글라스, 이상한 괴물이 만든 틈새와 그 틈 사이로 보이던 수영장의 푸른 물결. 분명 그 찢어진 공간들은 선글라스에만 비쳤죠. 그러고보니 미술 선생님이 했던 말도 떠올라요. 쫒아간 도둑이 수영장에 빠지더니 사라져버렸다고. 실패: 불현듯 어젯밤의 꿈이 떠오릅니다. 검게 군데군데 물들었던 세상과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던 순간, 이상한 괴물과 틈 사이로 휘말려 빠져버렸던 KPC의 모습. 그리고 오늘 아침, 손에 잡혔던 선글라스. 기억 끝이 마치 물에 젖은 듯 축축했던 것 같아요. |
어젯밤 꿈과 지금의 순간이 겹쳐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겁니다. 쫒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면 등 뒤에는 어느덧 건물의 아래가 절반쯤 부서져 사라진 체육관의 벽이 닿아요. 앞을 헤집어 나가고 싶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뚫고 나가기란 불가능해보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이 체육관 안으로 숨는 수밖에 없습니다. 행운을 조금 더 빌어보자면, 체육관이 느리게 사라지길 바라는 수밖에요!
체육관의 문을 열고 다 부서진 아래층의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갑니다. 우리를 뒤쫒아오는 글자들은 계단을, 서로를, 사라지는 캐비닛을 밟고 거슬러 올라오지만 뒤로 나동그라집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 뛰어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예요. 옥상의 문을 열면 푸른 수영장 바닥의 페인트와 그 위에 찰랑이는 물결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당신들을 맞이합니다. 등 뒤로는 우당탕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더불어 문을 열려는 듯 덜컹거리는 소음이 들려요.
쏴아아.
나뭇잎이 부딪치며 잔 바람을 일으킵니다. 유일하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곳이죠, 여기는. 사라진 도둑이 빠졌다는 곳. 꿈 속의 괴물 너머로 보였던 곳. 순간 햇빛의 조각이 탐사자의 눈을 따갑게 간지럽힙니다.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탐사자와 KPC의 시선은 자연스레 수영장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합니다. 그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흰 빛이 새어나오고 있어요.
(※KP 정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볼 경우, 하단의 지문을 추가 송출해주세요.)
(‘몸을 기울여 더 가까이 살펴보면, 꿈 속에서처럼 여러 겹으로 찢어진 공간과 그 밑의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에요. 저 겹겹이 찢겨진 틈들은 각자 다른 색의 하늘이 비치고 있어요.’)
덜컹!
닫아두었던 문이 거세게 흔들려요. 이윽고 철문이 와장창, 굽혀지고 부서지며 활자의 파도가 몰아칩니다.
탐사자, 당신은 주인공이죠.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이 만드는 ‘우리’의 다음 페이지는 어떤 내용이죠?
이하 엔딩 분기입니다.
탐사자가 수영장에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고 뛰어들었다면 01. Back Light History
탐사자가 수영장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02. Spotlight For Main Story
탐사자가 수영장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뛰어들었다면 03. Another New Page?
엔딩
01. Back Light History
(추천 BGM: 닐케이 - 소중한 기억 / https://youtu.be/ArmMay-4Sos )첨벙!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물 속으로 뛰어듭니다. 투명하고 차가운 물방울이 우리의 시야를 적십니다. 귓가에 시끄럽게 맴돌던 매미의 울음소리가 물 속에 잠겨 웅웅대면 우리의 뒤를 따라 빠져든 글자들이 푸른색, 노란색, 검은색, 초록색의 안개가 되고, 잉크가 되어 끄트머리부터 녹아내려 사라집니다.
세상이 온통 푸르릅니다. 여름을 닮아, 밤하늘을 닮아. 또는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색의 녹음을 따라. 푸르름과 녹음은 한끗 차이랬던가요. 잉크가 녹아 섞여들어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물결 너머로 투명한 백지 같은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축축하게 젖어든 흰 교복이 물결의 흔들림을 따라 둥실, 떠올라 우리의 뺨을 간지럽혀요.
등을 돌리면 우리의 뒤에는 흰 빛이 빛나고 있어요. 빛이 비쳐오는 그 틈새 너머 무엇이 있을지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아직 이 소설은 쓰여지고 있다구요.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의 끝을 아는 주인공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달리 두렵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너와 함께이기 때문이겠죠, KPC.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 몸은 세계의 찢어진 끝과 마주합니다. 흰 빛이 시야를 뒤덮고, 보이지 않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면……
♪♫♪-
조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떤 잡음도, 지직거리는 소음도 섞이지 않은 종소리가. 귓가에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듣고 있으면 조금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탐사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쉽니다. …잠깐만요?
주변을 둘러보면 처음 보는 교복, 처음 보는 친구들이 가득한 낯선 교실의 창가 가장 뒤쪽 자리에 탐사자는 앉아 있습니다. 주변엔 아는 얼굴 하나 보이지 않아요. 탐사자는 자신의 옷을 살펴봅니다. ‘탐사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명찰의 이름. 이게 무슨 일이죠? 우리는 방금까지 수영장 속이지 않았나요?
열린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당신의 뺨을 간지럽힙니다. 흰 커튼이 바람을 따라 펄럭여 당신의 시야에서 아른거려요. 익숙한 듯 낯선 초여름의 풍경입니다. 기시감이 느껴질 것만 같아요.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열린 교실 문 바깥에서부터 들립니다. 불규칙하고 바닥을 끄는 발소리. 몸을 반쯤 내밀고 바깥을 살피던 같은 반 친구가 빠른 발걸음으로 제자리에 앉습니다. 같은 곡을 변주하는 것 같지 않나요? 당신의 소설 속 첫 등장 장면과, 지금의 순간이.
자연스럽게 탐사자의 시선은 뒷문으로 향합니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을 향해 친구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출석을 부르기 위해 선생님이 교탁 위에 출석부를 올려놓으면,
“죄송합니다!”
뒷문을 열고 누군가 뛰어 들어와 세찬 숨을 고릅니다. 몸을 숙여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는, 주인공과 똑같이 등장한 사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옷태. 익숙한 머리모양. 그의 호흡이 조금 가라앉으면, 몸을 돌려 당신의 정반대편 분단 가장 뒷자리에 앉습니다.
“KPC, 지각이니? 다음부턴 늦지 마렴.”
가볍게 타박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책상 위에 교과서 대신 소설책 하나를 꺼내 올려둡니다. KPC, 그의 교복 위에 분명히 적힌 명찰의 이름이 보여요.
찰나였을까요. 고개를 돌린 KPC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그는 당신을 보고 잠시 놀란 눈을 하다, 웃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가 작게, 입모양을 지어 속삭입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탐사자.”
01. Back Light History
PC, KPC 생환
시나리오 클리어 보너스 이성 1d5+1
두 사람은 현실과 소설의 경계에서 '우리'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02. Spotlight For Main Story
(추천 BGM: Sereno - 한밤중의 별빛찬가 /
https://youtu.be/3FukdocUxrI )
단 한 걸음. 한 걸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우리는 활자의 파도에 휩쓸려 이끌리고 맙니다. KPC의 어깨에, 팔에, 다리에, 탐사자의 허리에, 손에, 목에, 수없이 많은 문장과 문단, 자음, 모음이 뒤덮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조금도 나아갈 수 없고, 시야는 점차 흑과 백, 단 두 가지의 색으로 물들어 뒤덮여요. 그들이 붙든 자리부터 서서히 우리는 색을 잃고 부서져갑니다.
세상이 온통 어두컴컴해집니다. 공허를 닮아, 수영장 바닥에 보였던 그 검고 끝없는 세상의 끝을 닮아. 또는 부서져 사라지는 백지 위의 활자들을 따라. KPC의 옆에 일그러져 떠올랐던 노이즈들을 기억하나요? 탐사자의 손이, 발이, KPC의 얼굴이, 형체가, 잉크가 섞이듯 섞여들어갑니다. 검고 푸르고 초록색의, 가끔은 노랗기도 하던 노이즈가 되어서. 섞여들어가는 너와 나는 무지갯빛이 됩니다. 일렁이는 하늘은 불투명한 백지와 같이 한없이 막막하게만 느껴져요. 귓가에는 이제 사람의 말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이 뭉개진 괴성만이 가득합니다.
순간 바닥이 흔들리다, 무너집니다. KPC와 탐사자는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드디어 체육관이 모두 부서진 모양이에요. KPC의 손마저 잡히지 않아, 탐사자의 손은 허공을, 빈 공간을 휘적입니다. 점차 가라앉는 몸은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집니다. 곧 흰 빛이 시야를 뒤덮고, 보이지 않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면……
♪♫♪-
조례의 시작이자,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규칙적인 종소리가 들립니다. 어라, 탐사자. 벌써 더위에 지쳤나요? 졸고 있으면 어떡해요! 이제 곧 소설의 첫 장면이 시작될 거라구요!
희뿌옇게 흐린 머릿속은 방금까지 꾼 꿈이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아요. 기억나는 건 나를 보며 웃던 누군가의 입매일 뿐입니다. 열린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당신의 뺨을 간지럽힙니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해 목 뒤에 땀이 흐릅니다. 초록빛으로 점점이 물들어 일렁이는 커튼은 나부낄 때마다 탐사자의 시야를 가려요. 오늘도 당신의 자리는 창가 분단의 가장 뒷 자리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열린 교실 문 바깥에서부터 들립니다. 규칙적인 발소리 속에 섞여 겹쳐 들려오는 또 하나의 발소리는 낯설지만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야, 탐사자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잖아요. 앞으로의 줄거리를 예상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구요. 게다가 탐사자는 주인공입니다. 장르도, 사건도 주어지지 않은 소설이지만 엄연히 주인공이에요. 모두가 탐사자의 바람대로 이야기를 이끌어줄 겁니다. 그게 작가가 바라는 전개일 테니까요.
소설 속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 소설은 지금 막 새로 쓰이기 시작한 소설이라고 하던가요. 여전히 비어 있는 당신의 정반대편 분단의 가장 뒷자리가 신경쓰이지만, 주인공은 가장 늦게 등장하는 법입니다. 저 자리는 새로 올 그 사람을 위한 자리겠죠.
열린 교실 앞문으로 선생님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옵니다. 새하얀 교복, 깔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 그 왼쪽 가슴에 박혀 있는 명찰의 이름 세 글자, KPC. KPC, 저 이방인의 이름인가봐요. 혀에 익숙하게 구르는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려봅니다. 이 익숙한 기시감은 나와 KPC를 이어주기 위한 소설의 장치일까요.
“다들 조용. 오늘 새 친구가 전학왔다. 자, 자기소개 하겠니?”
시끄러운 교실은 담임 선생님이 몇 번 교탁을 두들기자 곧 조용해집니다. 모두들 새로 등장한 KPC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가 또 하나의 주인공일까요? 아니면 그는 나의 악당이 될까요? 모두들 KPC가 갖고 있을 이야기가 궁금한 듯, 저들끼리 작게 속삭이며 KPC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당신과 나 사이에 이어질 미래로 향해 있습니다. 탐사자도 주인공 된 도리로서, 상대역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KPC, 너는 어떤 사람이에요? 너는 앞으로 나와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까요? 우리가 남긴 발자욱들은 어떤 페이지가 될까요? KPC, 네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전학 온 KPC입니다.”
자기소개를 하며 교실을 둘러보던 KPC는 탐사자를 보고서 미묘한 표정을 짓다 웃어보여요. 예상대로 선생님은 당신이 지켜보던 자리에 KPC를 앉힙니다. 그는 깨끗한 가방을 열어 교과서와 필통, 그리고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요.
찰나였을까요. KPC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그는 옅게 웃어보이며 입모양으로 속삭입니다. 그의 낯선 웃음이 밉지 않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요?
“안녕, 나의 주인공.”
반가워요, 나의 악당. 나의 상대역. 새롭지만 익숙한 하루가 오늘도 시작됐습니다.
02. Spotlight For Main Story
PC, KPC 생환
시나리오 클리어 보너스 이성 1d3
이 소설은 이제부터 당신들의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엔 늘 스포트라이트가 비칠 거예요.
03. Another New Page?
(추천 BGM:
닐케이 - Endless Love / https://youtu.be/3biyCvpLSU0 )
첨벙!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물 속으로 뛰어듭니다. 투명하고 차가운 물방울이 우리의 시야를 적십니다. 시야가 한순간 불투명해지고, 온 세상이 푸른색으로 물들어요. 귓가에 시끄럽게 맴돌던 매미의 울음소리가 물 속에 잠겨 웅웅대면 우리의 뒤를 따라 빠져든 글자들이 푸른색, 노란색, 검은색, 초록색의 안개가 되고, 잉크가 되어 끄트머리부터 녹아내려 사라집니다.
세상이 온통 푸르릅니다. 여름을 닮아, 밤하늘을 닮아. 또는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색의 녹음을 따라. 푸르름과 녹음은 한끗 차이랬던가요. 잉크가 녹아 섞여들어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물결 너머로, 투명한 백지 같은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축축하게 젖어든 흰 교복이 물결의 흔들림을 따라 둥실, 떠올라 우리의 뺨을 간지럽혀요.
등을 돌리면 우리의 뒤에는 흰 빛이 빛나고 있어요. 수영장 바닥, 선글라스의 유리 너머로 찢겨진 책의 페이지들이 일렁입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너와 처음 마주치던 날의 새파란 하늘, 너와 함께 걷던 노을진 분홍빛의 하늘, 새까맣게 물들었던 밤중의 하늘, 그리고 터지는 기포를 닮은 흰 빛의 반짝이는 별이 박힌 검은 우주. 잉크가 퍼지듯 찢겨진 페이지에서 색색의 하늘이 새어나와 수영장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입니다. 저 곳 어딘가, 네가 온 세상이 있겠죠. 탐사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러나 KPC를 닮아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색들로 가득찬 끝없을 세상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 몸은 세계의 찢어진 끝과 마주합니다. 맞잡았던 손은 일렁이는 물살에 휘말려 서로를 놓칩니다. 흰 빛이 시야를 뒤덮고, 보이지 않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면……
♪♫♪-
아침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탐사자를 어지럽힙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알람을 끄려 손을 뻗으면, 툭. 무언가 손 끝에 걸려 가볍게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 안에 잡히는 네모난 무언가를 들어보면… 선글라스?
탐사자는 저도 모르게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을 둘러봅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본 세상은 푸르게 물들어 퍽 달라보여요. 우글거리는 글자들 사이마다 아지랑이 피듯 일그러지고 찢겨진 책의 페이지들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페이지 속 어딘가에서, 방금 막 일어난 듯 자신의 방에서 교복으로 갈아입던 KPC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KPC 역시 시선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요. 그가 작게 입모양만 지어 속삭입니다.
“하교 후에 만나, 탐사자.”
찢겨진 페이지가 점차 좁아질 즈음, 네가 던진 시원한 얼음물이 내 손에 안착합니다. 표면에 이슬이 맺힌 얼음물 속 얼음이 덜그럭, 가벼운 소리를 내며 흔들려요. KPC가 마치 영화의 프레임처럼 끊기고, 잘리며, 앞으로 나아가면 찢겨진 페이지 하나가 닫히고, 그 옆에 또다시 찢겨진 페이지가 하나 생겨납니다. 가방을 메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는 너의 뒷모습이 비치는 틈새가.
선글라스를 벗고 방 안을 둘러봅니다. 방 안은 여느 날과 다름 없이 평범한 풍경이에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던 만나게 될 겁니다. 만나고 싶다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은 아주 얇고 불투명한 종이 한 장이라는 벽에 둘러 싸여 있고, 수없이 찢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할 겁니다. 그러니 그 벽만 넘어간다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귓가에 따갑게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조례가 시작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던가요?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지각생 역할은 탐사자가 맡겠네요.
어느덧 찾아온 한여름의 열기는 아침부터 탐사자의 목 뒤로 찐득하게 땀을 흐르게 만들지만 불쾌하지는 않아요. 너로 인해 이 곳의 시간도 새로이 쓰여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오늘도 또다시, 찾아온 아침입니다.
03. Another New Page?
PC, KPC 생환
시나리오 클리어 보너스 이성 1d3
시나리오 클리어 보너스 [렝의 유리로 된 선글라스]
너와 나는 서로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건 이어져 있을테니까요.
- 20. 06. 25 완고
-20. 06. 26 테플 시작
-20. 07. 06 테플 종료
-20. 07. 08 탈고 완료
-20. 07. 08 공개 배포
후기
― 일 년을 돌아 여전히 백호진의 낭만, 백호진의 주인공인 악당 서윤이에게.
우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해주신 앤오님과 윤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검토해주시고 플레이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학생이고,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가 유독 바빠서 학기 중엔 결국 시나리오를 못 쓰는 것 아닌가 했는데 하나는 썼어요 야호! 항상 후기를 신나게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마감하는데, 정작 시나리오 마감 이후로는 할 말을 다 쏟아부은 느낌이라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이번 시나리오는 개인적으로 꽤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저는 밝은 글이... 안 어울리더라구요.(차분) 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웠으니 됐습니다. 운 좋게 1주년이 딱 된 날(20. 07. 08♥)에 배포할 수도 있게 됐구요! 호진이가 소설을 쓰는 친구고, 언젠가 윤이가 너는 주인공이라고 했던 말에서 착안해 그렇다면 '우리'만의 서사로 바꾸어버리자 마음먹은게 여기까지 다다랐네요. 윤이야 내가 많이 좋아해...ㅠ... 사랑해... 내 악당...ㅠ
작업곡으로는 이피리님의 데이식스 플레이리스트의 곡들을 주로 들었습니다. 여름하면 데이식스죠 데이식스 들어주세요... 쏟아진다랑 wow랑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진짜 대박이거든요 여러분 절 믿고 데이식스 들어줘요... 모두들 여름이었다 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개변과 문의는 언제든 받고 있습니다!
https://youtu.be/3b0tY6DRq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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